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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ART HISTORY/동양 미술사

남북국 시대~고려까지의 한국 미술사

by 노마드 제시 2022.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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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제시와 함께하는 동양 미술사, 세번째 포스팅입니다. 오늘은 남북국 시대부터 고려까지 함께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남북국 시대

과거에는 이 시대 역시 '통일신라 시대'라 부르기도 했지만 발해의 역사에 관한 내용을 넣기 위하여 '남북국 시대'라는 용어가 비교적 최근 쓰이게 되었는데,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에 의해 정복당한 698년~ 935년까지의 기간을 '남북국 시대'라고 칭한답니다.
이 시기에 북방의 만주에서는 고구려의 유민들이 건국한 발해가 거란과 대립하며 확장되기 시작했습니다.


통일 신라

모두 한 번쯤 답사를 다녀왔을 법한 '경주'에는 통일 신라 시대의 상징적인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바로 '불국사'와 '석굴암'입니다. 그와 동시에 한반도의 석탑 건축 양식을 대표하는 건 불국사 내에 멋지게 세워진 다보탑과 석가탑이지요.
그 밖에도 경주 남산 내에는 많은 석탑, 불상 등이 산재해있습니다. 현재 경주 일대는 '경주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당당히 등재해 있습니다.
특히, 신라시대 황금기 불상인 석굴암 본존불은 건축학적으로 아주 세밀히 계산하여 조성한 '인공 석굴'일 뿐더러, 사암이 대다수인 중국의 서부와는 다르게, 화강암이 아주 많은 한반도의 환경에 맞춰 독자적으로 조성된 것입니다. 


발해

발해를 대표하는 유적으로는 지린성 룽터우산 '고분군 정효공주묘'가 있습니다.
발해의 3대 왕, '문왕'은 자신의 딸 정효, 정혜공주의 죽음 이후에 분묘를 만들었습니다. 고구려 출신 유민들이 지배계층을 차지하고 말갈계통 민족들이 피지배계층을 구성한 국가가 바로 발해였던 것입니다. 정효공주묘의 벽면에는 여러 인물의 군상이 표현되어 있지요.

 

 

고려

'고려'하면 개인적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부분은 역시 현재 대한민국의 외국어 표기로 선정된 'KOREA(COREA)'의 어원이라는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 우선 고려의 미술사에 관해 설명하기 전, 간단한 고려 역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라시대만큼이나 국제적인 분위기를 띄웠던 '고려', 고려시대 예상강 하류에 위치한 '벽란도'에는 동남아시아뿐 아니라 아라비아나 페르시아 출신 상인들과의 교역이 잦았습니다. 청산별곡, 서격병곡 등 여러 고려가요가 있는데, 그 중 특히 쌍화점을 보면, 당대 사회 분위기가 고려시대 이후인 조선시대보다도 훨씬 자유로웠다는 점을 쉽사리 알 수 있습니다. 
918년~ 1392년까지 존속한 고려왕조는 왕조 초기엔 여진, 거란과 대립했고, 후기에는 원나라의 간섭과 지속적인 왜구의 약탈로 고통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불교'는 귀족뿐만 아닌 서민 계층까지 아우르는 국가의 이념으로서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에 자연스럽게 고려의 불교 세력이 강력한 권력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고려의 미술품

학 등이 장식된 옥색 고려 청자의 모습.

'고려의 미술품'이라 하면 역시 '고려청자'가 먼저 생각납니다. 
고려청자는 좋은 교역품이었던 다른 도자기들과는 상이하게 주로 고려 안에서만 유통되었습니다. 한반도 내에서 유통되는 고려청자는 현재 전라남도에서 생산된 후, 배를 통해 개경까지 운반되곤 했는데, 현재의 신안해저유물 매장해역에 이 배가 침몰한 기록도 있습니다.
타국의 상인들이 주로 송나라, 원의 백자를 교역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 해역에서 발굴된 청자들을 보면 색이 어둡고 대량 생산된 흔적이 남아있는 청자들이 많았다는 조사로 하여금 당대 서민층 대상의 청자 시장이 꽤 활성화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답니다.

 

아름다운 비취색 즉 옥색을 주 특징으로 가진 아름다운 고려청자는 문벌 귀족들이 권력을 잡았던 1050년 무렵~ 무신정권 끝자락인 1250년경까지 제작되었답니다. 
그렇기에 두 정권 시대에 제작된 고려청자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는데, 우선 문벌 귀족의 지배 시기에는 '유교' 그리고 송나라 귀족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비교적 심플하지만 세련된 형태를 나타냈습니다. 그와 반대로 무신정권 후기의 청자는 '도교' 영향을 크게 받아 유려한 문양을 띄게 되었던 겁니다. 
후기 고려청자는 '청자 비룡 주전자'처럼 복잡한 동물의 문양으로 제작되기도 했으며,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과 같은 상감 기법을 이용한 문양이 새겨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끝맺음 혹은 변화가 있기 마련이지요. 차후에 원이 지속해서 간섭하면서 고려청자 제작은 쇠퇴하게 되고, 중국산 백자를 모방한 분청사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고려 계급별 유행한 미술

한편 고려의 하층민 사이에선 '미륵신앙'이 성행했습니다. 이런 고려시대 서민들의 믿음을 반영한 모습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은 현재 국보 제323호로 등재되어있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며 논산에 있습니다.
이 입상은 '은진미륵'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고려 귀족들의 화려하거나 세련된 미를 찾아볼 수는 없지만 토속적이고 강인한 위압감이 아주 잘 표현되어있습니다. 화강암이 주는 특유의 묵직한 감각은 그 당대 서민들이 선호했던 '강인한 미륵부처'의 형상을 완벽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서민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청자 시장이 있으며 하층민 사이에서 성행한 '미륵신앙' 이 존재하듯이, 물론 귀족들 사이에서도 고려 불화가 유행했습니다. 
고려 불화는 대부분 '아미타여래'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이 세 보살을 소재로 한 경우가 많습니다. 고려시대 귀족들은 집안의 불감에 불화 또한 봉안하고 섬겼습니다. '서방정토 신앙'의 구원 사상과 연관된 이 세 보살에 대해 간단한 설명해 드리자면 '아미타여래'는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머물며 설법하는 부처, '관음보살'은 온 세상 중생들의 형태와 소리를 보고 들으며 구원하는 보살이며 지장보살은 미륵불의 출현 전까지 계속하여 지옥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입니다. 
근대로 진입하여 서양과 교역하면서 다시 팔려나가, 아주 뛰어날뿐더러 세밀하고 반투명한 색 묘사로서 특이한 표현법을 가진 고려의 불화들은 거의 외국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는 고려 후기에 왜구에 의해 불상과 함께 약탈당하는 불상사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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