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르그스키를 만나다
벌써 30대 중반에 들어선 일리야 레핀은 이 시기부터 수많은 러시아의 문화 엘리트들과 교류를 하고 그들의 초상화를 그릴 기회가 많아지는데, 운이 좋게도 앞서 만났던 인물인 파벨 트레치야코프가 본인의 미술관 내에 레핀의 멋진 초상화들을 전시할 기회를 줍니다.
이 당시에 러시아 문화예술계에서 거의 모두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많은 유명인들이 레핀의 모델이 되고자 했는데, 원래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에 걸릴 예정이었던 초상화들은 간혹 또 다른 든든한 지지자인 스타소프에 의해 소장되기도 했습니다.
특히나 음악계에서도 일가견이 있던 스타소프 덕분에 19세기의 림스키 코르사코프, 루빈슈타인, 무소르그스키를 비롯한 많은 훌륭한 음악가들이 레핀 그림의 모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 멋진 음악가들의 초상화 중 단언 최고라 일컬어지는 작품은 바로, 알렉산드르 스크랴빈 이전 서유럽과 세계에 러시아의 음악을 소개해준 무소르그스키의 초상화입니다. 레핀이 그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 당시엔 사실 무소르그스키는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서 군부대의 정신병원에 입원해있었습니다.
이런 시기에도 레핀은 주저하지 않고 나흘 동안 '있는 그대로'의 무소르그스키를 가감 없이 그렸으며 작업이 끝난 이틀 후, 무소르그스키는 영원한 잠에 빠집니다.
있는 그대로라 함은 즉 레핀이 무소르그스키의 현재 그대로, 혼란한 상태에 빠져있는 알코올 중독자의 모습으로 그대로 그린 겁니다.
또한 무소르그스키의 열렬한 팬들 역시 그를 제도에 저항하는 비순응 주의자로 생각했는데, 레핀은 이 모습을 정확히 포착했으며 차후, 무소르그스키의 초상화는 수많은 레코드의 표지를 장식하고 세계에서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됩니다.
이러한 예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역시 레핀이 초상화가로써 가장 중요시 생각했던 가치관은 균형이라는 점입니다. 우연과 필연의 그 중심에서 찾을 수 있는 '순간'의 포착인 것입니다.
사랑으로 그리다.
주인공에 대한 사랑, 관심이 바로 레핀의 초상화를 더욱 특별히 만드는 가치입니다.
일례로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을 작업할 당시에도 그가 수백 점의 습작을 만들었다 했었는데, 이 성향은 초상화에서도 역력히 드러납니다. 그 스케치와 습작들은 모두 같은 정성이 들어가 있으며 양질을 유지한 건 대단한 일입니다.
엄청난 집중력은 역시 그 인물들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며, 이 사실은 위에 언급했던 무소르그스키가 그의 친할 친구였으며, 친분을 쌓을 여건이 되지 못한 인물들의 초상화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존재함에서 알 수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농지에서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 등으로 유명한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는 레핀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며, 모델로 유명합니다. 그의 특색 있는 외모와 성격은 가히 레핀에게 최고의 모델이었습니다.
그 역시 1880년도에 처음으로 만남을 가졌고 많은 대화를 나누며 서로에게 매료되었는데, 레핀은 그의 탁월한 사상과 문학에 매료되었고, 당시 농부로 살아가던 톨스토이 역시 전직 농부의 아들이었던 레핀의 매력에 끌리게 된 것입니다.
레핀의 예술관에 큰 영향을 미친 건 톨스토이가 레핀의 예술관에 대해 칭찬뿐 아닌 질 높은 비판 또한 제공해줌으로써 레핀의 예술적 관점이 확장되었습니다.
톨스토이가 사망하던 해인 1910년도 까지, 무려 30년 동안이나 그들의 우정이 지속되었고 계속 교류해온 만큼 많은 양의 초상화와 그의 생활을 묘사했는데 톨스토이의 신화를 조성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혁명을 거부하다
레핀의 나이가 예순둘인 1903년에는 레핀의 마지막 대작 <창립 100주년, 1901년 5월 7일 국가 의회>라는 가로 9m의 작품을 완성해냅니다.
그의 내공이 깃든 붓터치로 혼신의 힘을 담아, 아주 짧은 시간 내에 이 큰 작품을 완성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경력은 여기에서 끝난다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오른손 관절을 더 이상은 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후로도 레핀은 유화 팔레트를 허리춤에 묶어 왼손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이제는 이전과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없었습니다.
1917년, 레핀은 소비에트 혁명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더이상 러시아에 머물기 싫었습니다.
평소 민중에 대한 생각을 하던 레핀으로써 첫 번째인 2월 혁명에는 지지를 보냈으나, 볼셰비키의 10월 혁명에선 회의감을 느끼며 러시아령 핀란드의 작은 영지, 쿠오칼라로 떠납니다.
그는 소비에트 당국의 수많은 귀국 권유를 거절하고 1930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핀란드에 남습니다.
그가 사망한 이후, 1948년에 그가 살았고 끊임없는 창작혼을 불태운 쿠오칼라의 이름을 '레피노'로 개칭하며 그를 기리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일리야 레핀의 삶과 예술세계' 6부작을 모두 마쳤습니다.
다음 번 포스팅에서도 미술사에서 중요한 화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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