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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ART HISTORY/위대한 화가들

볼가강에서 배끄는 인부들을 마주한 레핀

by 노마드 제시 2022.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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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아하는 화가인 '일리야 레핀'의 소개를 지난 포스팅에 이어서 하려니 벌써 가슴이 설레입니다. 

'일리야 레핀'의 탄생부터 이전까지의 내용은 아래 포스팅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일리야 레핀'의 삶과 예술세계 1부

지난 포스팅을 마지막으로 고대~근대 서양 미술사 그리고 한국 미술사까지 저와 함께 알아봤습니다. 이번 포스팅을 시작으로 제가 좋아하는 예술가,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품들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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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 관점의 확장

황실 예술 아카데미에서 기량을 쌓아 인정받기 시작한 레핀은 1860년대부터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초상화의 모델이 된 사람들은 다름 아닌 그의 어머니, 형, 그리고 미래에 아내가 될 '베라 셰브초바' 등 주변 인물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아카데미의 모범생이었던 레핀의 그림 주제는 점차 '삶에 대한 관심'이었으며, 이 마음을 회화의 영역에서 구현하려는 수많은 시도를 하게 되었는데 이 행위는 레핀 초기 작품의 특성이 됩니다.

이때부터는 아카데미의 과제이거나 친밀한 주변 인물들의 초상화이거나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야이로의 딸의 부활>이라는 이 작품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아주 훌륭한 예입니다.

이 작품은 다름 아니라 성서를 주제로 했는데, 자칫 진부해질 수 있는 주제를 완벽하게 표현하는 데 성공한 이 작품으로 당당히 콩쿠르 금메달을 수상하게 되었으며 이 덕분에 외국 여행 지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레핀이 추앙하던 '알렉산드르 이바노프'의 대표작인 <그리스도, 대중 앞에 출현>이라는 작품의 장점들을 본인의 시각 언어로 순화시킨 레핀은 마치 과거의 라파엘로와 같은 특유의 흡수력으로 모든 것을 수용하고 자신이 재창조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여름의 볼가강에서의 추억

지난 포스팅에서도 가장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던 <볼가강의 배끄는 인부들>이라는 이 작품은 역시 레핀에게 화가로서의 가장 큰 명성을 남겨준 작품입니다. 
어찌 보면 잠 우연한 계기 때문에 이 그림 작업에 착수했는데, 네바강에서 친구들과 함께 배를 타며 유유히 쉬고 있던 도중 먼발치에서 레핀의 뇌리에 아주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된 광경이 펼쳐집니다. 
이미 증기선이 이용되고 있던 그 시절, 마치 '가축'과 배를 끌고 있던 인부들이었던 것입니다.
졸업 동시에 보장된 6년간의 유학 대신 그의 마음의 소리를 듣습니다.

 

1900년대 러시아에서 실제 촬영된 바지선 인부들의 사진이다.
1900년대 러시아의 바지선 인부들

레핀은 장차 풍경 화가로 유명해질 '표도르 바실리예프'와 함께 이번엔 '진짜 뱃사람의 삶'을 보기 위해 볼가강으로 떠나 두 번의 여름 동안이나, 인부들과 함께 진실한 시간을 보내며 수많은 습작을 만들고 소외된 이들을 한 치의 거짓 없이 '그 모습 그대로' 작품에 담은 겁니다.
레핀이 인부들과 함께 생활하며 알게 된 사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단 점인데, 성직자, 이콘 화가 등 그들만의 과거가 있는 개인이었던 사실이란 점입니다. 
또한 레핀 본인 또한 당대 러시아의 일반적인 작품들과 같이 도덕적 일화를 그리려는 경향으로 작품의 방향성을 잡았으나 바실리예프가 이를 막아주었고, 진정 '사실주의'라 말할 수 있는 위대한 작품이 탄생한 것입니다.

일리야 레핀은 그림을 구상하면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관람객의 위치에서 움직였습니다.

초기 에스키스들을 보면 완성작과는 상당히 다른 구도라는 사실을 쉽사리 알 수 있는데, 이는 레핀이 초기에 직접 관람객을 향하도록 인물을 배치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관찰자를 직접 대면하는 효과가 있었지만, 레핀이 원하던 '드라마'는 찾아볼 수 없었기에 결국 마지막으로 인물의 대각선 배치를 통해 독립적 개인의 초상을 보여주게 된 것입니다. 
관람객의 뇌리에 선명히 박히는 위대한 작품 <볼가강의 배끄는 인부들>의 탄생입니다.

 

 

레핀, 유럽으로 유학길에 오르다.


위에 언급하였으며, 레핀의 졸업 작품인 <야이로 딸의 부활>은 1871년에 제작되었으며 곧바로 6년간의 해외 유학을 갈 수 있었지만 레핀이 그 대신 우선으로 볼가강에서의 작업을 결정하고 <볼가강의 배끄는 인부들>을 완성한 건 1873년입니다. 레핀은 같은 해 5월, 장차 그의 창작활동에 큰 영감과 원동력이 되어줄 유럽으로 향하게 됩니다. 

 

빈 국제 전시회장에서는 이미 <볼가강의 배끄는 인부들>을 출품하여 크나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기에 레핀은 빈을 시작으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로마를 역시 방문한 후 파리 몽마르트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단순함, 우아함, 경쾌함이 세련된 취향에 녹아 들어있다.' 

레핀의 표현을 보아하니 그의 취향에 딱 맞아떨어졌던 것입니다. 

배움에 대한 주저가 없었고 수용 범위가 넓었던 레핀인 만큼 프랑스 인상주의에 매료되었고 <바다 왕국의 사드코>와 같이 그의 이전 작업과는 사뭇 다른 화풍의 작업 또한 성공적으로 흡수하고 제작합니다.

이러한 행보를 보이니 러시아 내에서는 역시 사람들의 걱정 또한 받는데, 평소 민중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줄 알았는데, 어찌 이러한 그림을 그렸냐는 평입니다.
또한 비난받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오늘은 성서를 주제로, 내일은 민중을 주제로, 외국의 서사시, 신문 기사, 멜로 드라마, 잔인한 역사의 한 장면. 연속성도 목적도 없는 우연적인 작품만 만드는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레핀은 이렇게 말합니다.

 


"옳음과 정당함도 좋다만 나 자신을 잃지 않겠다. 나는 많은 것을 사랑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 교훈을 위한 예술이 아닌, 내게 감동을 주는 모든 것을 그리고 싶다."

 

 

레핀은 이 한 문장으로 본인 창작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획득함과 동시에 본인이 추구하는 예술관을 고국에 전달해줄 수 있었습니다.

광범위한 관심 분야와 뛰어난 재능 그리고 그의 성품이 레핀 창작활동의 본질적 성격이라는 것이 아주 현저히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일리야 레핀의 삶과 예술 세계 2부'에서는 그가 아카데미를 졸업한 시점부터 그의 예술적 가치관이 확립되어나가는 과정을 위주로 정리해봤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좋아하며 애정이 깊은 예술가인 만큼, 더욱 상세하고 사실적인 정보를 전달해드리기 위해서 여러 편으로 나눠 작성해보겠습니다. 이상 노마드 제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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